남산골 한옥마을 [南山─韓屋─]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일대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
교통 :지하철 3, 4호선 → 충무로역 → 3번출구 →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 전통정원 안내-위 해설 옮김
우리 민족과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멱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으로 불리어 왔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의 조상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시·화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 놀이와 여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정원의 북동쪽 7,934㎡(2,400평) 대지에는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상품을 항상 전시·판매하고 있다.
정원의 서쪽에는 물이 옛스럽게 계곡을 흐르도록 하였고, 주변에는 고풍의 정자를
지어 선조들이 유유자적하였던 남산 기슭의 옛 정취를 한껏 느끼도록 하였다.
전통정원 남쪽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 29일
지하 15m 지점에 매설하였다. 보신각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함으로써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이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위 해설을 옮김...남산골 한옥마을 안내
남산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언저리는 조선시대만 해도
맑은 물 흐르는 산골짜기에 천우각이 있어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한양에서 이름 있던 곳이며, 청학이 사는 선향이라 하여 청학동으로 불렀다.
그리고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리울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제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리고자 물을 흐르게 한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하고, 서울의 팔대가로 불리어오던 사대부가로부터
일반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전통한옥 다섯 채를 옮겨 놓았다.
이들 한옥에는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는 가구들을 예스럽게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보고 알 수 있는 명소로 꾸몄으며, 전통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을 항시 전시하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1989년 남산골의 제모습 찾기 사업에 의해 조성한 마을로
수도방위사령부 부지를 인수하여, 서울특별시 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 동을 이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몄다.
1998년 4월 18일에 개관하였다.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가옥을 선정하였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데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복원하였다.
기단 앞에 두 개의 돌 기둥은 말에서 내릴때 딛는 곳이란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서울민속자료 24)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고,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서울민속자료 18)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것을,
맨 꼭데기 메인영상의 원본이미지...
외국인 연인의 모습이...우측마당엔 순두부를 끓이는 가마솥아궁이가 있다.
오위장 김춘영 가옥(서울민속자료 8)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서울민속자료 20)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중..
문화재이긴 하지만 소유권이나 기타 복잡한 문제로 일단 찻집으로 운영중이다.
중인의 가옥이긴 하지만 도편수 이승업이 손수 구석구석 지은것에 의미를 둔단다.
이승업이 1860년에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의 사대부 가옥부터 서민 가옥까지 당시의 생활방식을
한자리에 볼 수 있도록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는 가구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였으며,
전통공예 전시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을 안의 남산골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자연식생인 전통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캡슐을 지하 15m에 수장해 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한옥마을에서는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는 한국의 연극, 놀이, 춤 등이
공연되어 옛 문화를 접하며 배울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한다.-ⓒ 두산백과사전
이제부텀 함께 뜨락을 거닐어 볼까요?
다리품을 좀 팔아얄껀데 다니시다 힘드심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지요.
디딜방아(TREADMILL)
디딜방아의 유래는 고구려 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정도로 실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Y자 모양으로 된 발판을 발로 밟아 반대편의
공이가 오르내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다.
공이는 나무로 된 것과 같이 돌이나 쇠로 된 것이 있다.
오위장 김춘영 가옥 뜨락에서...
오죽장 [烏竹匠]
오죽(烏竹)을 이용한 공예기술 또는 장인.
1996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은 반죽(班竹)이라 불리는 검정색 대나무류로 신성한 곳에서만
뿌리를 내려 귀하게 여겼다. 오죽장은 표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있어
튼튼하고 생동감 있다. 자연의 색채 그대로 제작되므로 오래될수록
색채가 더욱 선명해지고 정감이 더해간다.
2000년 현재 기능보유자는 성동구 응봉동에 사는 윤병훈이다.
오죽장 -좌측 해설에서 옮김
동물중에 날짐승이면서 유일하게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까마귀는
반포조反哺鳥라 불리운다. 이러한 반포지효反哺之孝의 뜻이 들어 있어
까마귀 오자를 써서 오죽烏竹이라 일컫는다.
오죽은 예로부터 충효정절忠孝貞節을 상징하여 매우 신성시 여기던 식물이다
중국에서는 자죽紫竹, 일본에서는 흑죽黑竹이라 불러왔다.
재료선별과 제작방법이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오죽烏竹은 빛이 비치는 각도와
보는 위치에 따라 색채와 무늬가 변하여 생동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문양은 단순한 기하학 문양으로부터, 형상과 연결된 문양들이 한폭의
그림이 되는 기하화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오죽의 색채는 매우 아름답고 다양하며 표면 또한 칠이 필요없는 뛰어난
재료이다. 최소한 5년 이상된 대나무를 베어다 5년 이상 건조시켜 죽장에 쓰고
통대로 쓸 수 있는 것은 10년 이상 건조시킨 것으로 사용해야
오랜 기간이 지나도 터지지 않고 틀어지지 않는다.
뜨끈뜨끈 순두부 한 그릇 드세요. 맛짱이예요.
순정효황후 윤씨친가를 둘러 볼까요?
대문을 나오면 바로 아래가 천우각정자가 있는 전통정원이다.
전통정원도 둘러보고
순정효황후 윤씨가도 솔사이로 보인다.
팽이돌리기등 옛민속놀이와 탁본등 여러가지를 체험 할 수 있는 넓은 광장..
오후 3시..1시간30분동안 천우각 앞 무대에서 전통 민속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어릿광대역으로 열연중인 박정임 예능 보유자(파란한복)
발탈: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공연소개
일종의 탈놀이로 고아무대 시절에 명창 박춘재朴春載의장기였다.
발탈의 기원에 대해서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보다 확실하고
대체적인 견해는 남사당패가 행한 곡두각시놀음의 변형이거나
유랑예인流浪藝人들로 부터 파생되었으며, 그것이 협률사協律社를 거쳐
광무대光武臺와 가설극장, 창극단 등으로 이어진 것이라는게 지배적이다.
따라서 발탈의 기원은 일단 안성의 남사당패 놀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며 이것이주로 중부지방 일원에서 연희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발탈의 놀이판은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비슷한데 가로 130cm,
세로 1m 정도의 직육면체로 위와 뒤를 터놓고 앞과 옆을 막아 놓았다.
그 안에 연희자가 누워 발목만을 포장 밖으로 내 놓고 발목을 전후좌후로
움직여 탈이 웃거나 화내는 표정 등을 연출한다.
꼭두각시놀음처럼 포장막 앞에 한 사람이 앉아 발탈꾼과 재담을 나누며
극을 진행시킨다. 그 옆에는 피리.대금.장구.꽹가리 등의 잡이(樂士)들이
자리잡고 반주를 맡는다.
발탈의 춤은 어깨춤과 좌우치기, 목놀이 등 3가지의 춤사위가 등장하는데,
표출방법은 발의 움직임으로 하는경우와 대나무나 실로 하는 경우
그리고 손으로 춤추는 경우도 있다. *옮김
요기 숲속길로 들어도 남산타워 가는길이 나온다.
정문으로 들어와 우측 숲속 산책길로 오르면 끝부분에 타워가는길과 연결된다.
한옥마을에서 남산으로 연결되는 다리위에서 잠시...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걷기는 건강에 좋으므로..!
잠시 멈춰 서울시내도 내려다 보니 시원하다.
남산 봉수대가 숲사이로 자그맣게 보인다.
더 가까이....
남산 봉수대
남산 봉수대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릴레이식으로 중앙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서울특별시는 남산 봉수대 이외에도 무악동 봉수대와 아차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13호와 15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남산 팔각정..뒷편으로 남산타워가 위치해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오를수도 있다.
남산케이블카를 타는 곳:
지하철 4호선 명동역 3번출구에서 퍼시픽 호텔 오른쪽 길로 걸어서
7~8분정도 올라가면 된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운행<15분~20분 간격>
남산 팔각정 밑까지 3분 정도가 걸린다.
이용요금은 편도 어른 6,000원, 어린이 3,500원이며,
N서울타워 이용요금은 어린이 6,000원 어른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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