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제23호 청운교백운교 특히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이 아름답다. 이 다리를 건너 33계단을 오르면 하늘의 도리천이 33번째 천상의 세계로 오른 것이며 오르고 나면 부처님 몸에서 발하는 붉은 금색의 광명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는紫霞門에 이른다. 이제 중생은 佛國土로 들어가며 부처의 현실세계와 만난다 蓮華橋(아래층),七寶교를 지나 安養門에 이르면 아미타정토구역인 극락세계로 들어간다. 아미타정토사상은 화엄의 범주 안에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불국사는 大華嚴佛國寺로 부르며, 화엄사상 즉 一卽多 多卽一과 이상세계인 蓮華藏世界(法界)를 추구하며 아미타불보다 석가여래불을 우위에 놓았다 여기서 잠시 인터넷검색으로 불국사를 알아 볼까요? 불국사 [佛國寺]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虹霓門(홍예문)으로 무지개모양을 한 청운교의 모습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연화교는 10계단,칠보교는 5계단으로 이루어져 총 15계단임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출처:두산백과 . 위 해설을 옮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에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개창되고, 혜공왕 10년에 완성되었다. 조선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목조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웠고, 1969~1973년 처음 건립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서길이 90여m 되는 석축과 청운교, 백운교 위에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이 남북으로 놓였꼬, 썩가탑, 다보탑이 서 있다. 그 서쪽에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과 여래좌상 금동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다.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다. 불굯하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이땅에 세워 찬미하던 수도자들이 불도를 닦던 곳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로, 1995년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대웅전과 다보탑.. 이 다보탑은 국보제20호로 약 1년간의 보수를 마쳤다. 1972년 이후 37년만에 새 단장이다. 다보탑은 독특한 양식으로 신라의 미를 대표해 온 유물이지만 비바람에 석재가 훼손되고 이끼가 끼는 등 보수가 시급했다. 천년전 장인의 손으로 빚은 다보탑이 초음파 검사등 첨단 과학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동아일보 다보탑의 상륜부는 각을 죽인 8각인 데다가 원으로 받쳐져 하늘로 사뿐히 오르는 것 같다. 마치 활짝 핀 연꽃되어 구름타고 하늘로 날아 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상륜부는 탑신과 달리 청석으로 눌러놓았다. 다보탑은 국보20호 오랜 보수공사를 마치고 곧 가설재를 철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우리들앞에 자태를 뽑낼 것이다.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불인 다보여래는 "누군가 법화경을 설하는자가 있으면 보배로 장엄된 탑을 세워 그를 찬양하리라" 고 서원하였다. 이에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자 칠보로 장엄된 탑이 솟았다. 즉 석가 스스로 진리의 가교 역활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것이 다보탑이다. 1922년 일제가 수리하면서 기록을 없애버렸고, 난간도 없어지고 네마리 사자중 깨지고못난 한마리만 남겨 놓고 세마리는 훔쳐 갔는지 없어졌다. 이번 보수공사에서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을 모두 제거했다. 간결하고 장중한 기품, 담백하고 고상한 기품, 다보탑은 아름다움의 극치라 여성미가 있고 석가탑은 남성미가 넘친다. 이 석가탑은 석가여래 상주증명탑으로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여래를 상징한다. 1966년 제가 대학입학 한 해에 2층 탑신 사리공에서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녹색사리병,목제소탑,동경,비단 은제함,청동외함,향목,구술등이 나왔다 특히 같이 나온 유물과 함께 국보제126호로 지정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우리역사에 길이 빛날 세계에 자랑할 유물이다.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신 법당. 대웅(大雄)은 석가모니불의 덕이 큰 것을 표현하는 덕호(德號). 681년에 창건되었다. 여러 차례의 중수 중건을 거쳐 1765년, 창건 당시의 기단위에 중건되었다. 조선후기 불전건축(佛殿建築)의 대표작이다. 대웅전 앞 다보탑을 보기 위해 우측계단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10일 이후엔 막을 걷어내고 본 모습으로 볼 수 있단다. 불국사다보탑 (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층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 기단은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은 그 주위로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여기에 대나무마디 모양의 돌기둥, 16장의 연꽃무늬 등을 새겼는데, 돌을 깎아 세운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또한 석가탑의 머리장식이 후에 복원한 것인 반면, 다보탑의 머리장식은 거의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탑을 세운 시기는 불국사가 대규모로 새롭게 단장을 한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았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출처:문화재청 불국사 회랑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비를 맞지 않고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공간 .. 그곳을 회랑이라 한다 절이나 궁궐 터에도 이런 회랑이 발견..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 공간을 통해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불국사 ,꽤 넓은 대웅전 영역에는 모두 회랑이 둘러쳐 있다 회랑을 건립한 근본취지는 ,부처에 대한 존경의 뜻이다 대웅전의 정문을 바로 출입하는 것은 불경 (不敬)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참배객은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으로 출입하지 않고 회랑을 따라 움직인다 ... 위 해설을 옮긴다. 김교각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제33대 성덕대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24세에 출가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갔다. 스님은 처음에 중국 각지를 유행하시다가 구화산에 이르러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초당을 짓고 초인적인 수행을 하였다. 구화산의 주인이며, 이 지역의 토호인 민양화의 아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스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민양화가 스님을 찾아 답례를 하고자 필요한 것을 물어니, 스님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절을 짓고자 하니 가사 크기만큼의 땅을 시주해 달라 하였다. 이에 민양화가 승낙하여 스님이 가사를 펴니 구화산 99개봉우리를 모두 덮어 버렸다. 놀란 민양화가 스님에 귀의하여 구화산을 시주 했다는 일화는 김교각스님의 법력이 대단했음을 말해 준다. 스님은 구화산에서 최초로 화성사라는 절을 창건하시고 중생구제에 전력하셨으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당시 모든 사람에게 추앙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김교각스님을 친견하려 대중이 하루에 천명을 넘었으며 그 행렬이 산 밑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스님은 서기794년 수행의 자세로 입적하시니 세남99세였다. 시신은 3년이 지나도 얼굴과 살갗은 살아 있는 듯 향내음이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으니, 육신보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구화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이 되었으며, 김교각스님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생전에 언제 고국인 서라벌로 돌아 가시냐고 여쭈니 스님은 "1,300년후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1997년 스님의 탄신 1,300주년을 기념해 김교각스님의 탄생지인 경주에 구화산 화성사로부터 기증받은 등상을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게 되어서, 김교각스님의 유언대로 다시 고국에 돌아 왔으며, 지장보살의 자비를 펼치려고 우리에게 다가 온 것이다. 불국사는 김교각스님의 등상을 봉안함으로써 지장보살의 화신과 원력이 깃든 진정한 지장신앙의 도량이라 할 수 있다. 관음전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신 소전 손재형의 글씨이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 751년에 세워졌다. 여러차례의 보수와 중건을 거쳐 1973년. 불국사 복원때 다시 세웠다. 조선초기(1400년경)의 건축양식 국보26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국보 제26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8세기 중엽의 작품)이 모셔져 있다. 751년에 건립되었다. 그 후, 여러차례의 중수,중건을 거쳐 1973년.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 위에 중건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비로자나불은 智拳印을 하시며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부처님 높이 1.77m, 딱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짤룩한 허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이상화된 모습을 보인다 안압지를 향해 출발.. 안압지 정문을 들어선다. 해설을 옮긴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부속 건물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14년에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 들어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5년 준섬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거의 확인하였꼬,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궁궐의 축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첨성대에서 300m거리에 있는 반월성으로 이동이다. 석빙고 내부 모습 분황사석탑 (芬皇寺石塔)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솟은 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출처: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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