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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성쇠가 어디 인간사에만 국한되겠는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있는가 하면 혜성으로 사라지는 것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바빌론의 영화나 실크로드의 영광이 시간의 그늘 속에 묻혔지만 인디언만 살던 미주대륙에선 미국이 현대문명 개화의 꽃을 피웠고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이 또 다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태평양 연안국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도약을 하지 않는가. 공룡이 지배하던 지구를 체구 작은 인간이 다스리는 역설의 현장. 흥망성쇠는 길거리에 자라는 풀에서부터 위대한 우주까지 삼라만상에 적용되고 있다. 역사는 지금도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생성과 번영, 쇠퇴와 멸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만년설의 히말라야와 남극에도 인간의 발걸음이 연이어지고, 산속 깊숙이 자리잡은 사찰까지 이 법칙은 어김이 없다. 문수사의 독경소리는 낙암산과 영취산 안골짜기를 뒤흔들며 영축마을을 끝없는 불심에 젖게 한다. 낮은 등성이를 하나 넘어 자리한 절골에도 청송사는 사라지고 보물 382호 3층 석탑만 외롭게 남아 지난날의 융성을 나타낸다. 보물이나 빼어난 문화재가 없어도 신도가 즐겨찾는 사찰과 빼어난 문화유산이 있어도 이제는 사라져 버린 사찰 윤회는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가 보다.
망해사지 석조부도 표지석은 서있는데 보물 173호인 석조부도는 정작 찾을 길이 막연하다.
문수산(文殊山)은 높이 599.8m로 600m에도 미치치 못하는 높지 않은 산이지만 남으로 남암산(南巖山 542.9m)과 동쪽에 영취산(靈鷲山 350m)을 호위봉(?)으로 거느린 독립봉이다. 울산시 서쪽 들판에 자리한 때문에 야산이지만 위엄이 서렸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한 부드러운 능선은 아늑함을 풍겨준다. 곳곳에 바위 직벽이 병풍처럼 흘립(屹立)해 범상치 않은 때문인지 망해사 등 오래된 절터와 문수사 등 이름난 절이 있어 예부터 이름난 도량이다. 얕지만 위엄서린 봉우리와 부드러운 능선과 빼어난 암봉이 조화를 이룬 이 산 자락엔 대암호 병산골못 두현 천상저수지 등 못과 호수가 많아 드문 모양을 가진 산이다.
울산근교에 위치, 부산사람들에겐 생소하지만 3시간 안팎의 등산을 하기엔 적당하다. 노포동 지하철역에서 울산시내까지 운행하는 울산 버스(27번)를 타고 문수국교 앞이나 영해(지도상 표기. 현재는 거의 `영축'으로 부른다)마을서 하차한다. 초행인 경우 영해마을쪽이 한결 수월하다(버스기사에게 문수사앞에 내려달라고 하면 거의 이곳에 대준다). 부산~ 서창을 경유하는 7번 국도는 주변에 아파트가 늘어서 몰라보게 변했고 부산~ 울산의 도로가 아파트로 연결될 날이 머지 않은 듯하지만 4차로로 확장돼 차량소통은 비교적 시원시원하다. 큰길 건너 마을입구엔 까만 바탕에 흰글로 된 영해마을 표지석이 있고 `문수암 입구'라고 새긴 붉은 글의 돌비석은 슬레이트집의 담기둥으로 변해 눈길을 끈다.
차 2대가 비켜 갈 수 있는 시멘트길이 양쪽에 띄엄띄엄한 집을 비집듯 슬며시 고개 같잖은 고개를 넘어선다. 꽤나 넓은 들이 펼쳐지는 가장자리에 동네가 앉아있고 차 2대가 교행할 수 없게 좁아진 길이 들을 가로지른다. 들판길 옆 하얀 표지판엔 `이 지역에 무속(무당)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 울산군수 울산 남부서장'이라는 경고문이 씌어 있다. `경고문'과 `무당'은 붉은 색깔이고 나머지는 검은 글인데 붉은 글은 물론이고 오만방자한 단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아직도 `경고문'에다 `엄벌' 따위의 표기를 할 수 있는가, 요사이 때가 어느 때인데. 국민 모두를 범법자로 몰아도 유분수지, 이 무슨 해괴한 단어요, 얼마나 국민을 협박하는 말인가. 관이 국민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군림하려 하고 국민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태도를 우리는 이 조그마한 간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알림/이 곳에서 무속(무당) 행위를 하면 법의 처벌을 받게되니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식의 호소적이고 계도적인 간판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문민시대에 아직도 이따위 경고문이 있다는게 서글프게 느껴진다.
불쾌한 감정을 삭이며 노송이 듬성듬성한 산고개를 넘어서자 저편에서 볼 땐 틀림없이 고개였는데 정작 동네입구이다. 오른편 언덕에 `망해사지 석조부도 입구'라는 비석이 서있고 왼편은 학성이씨 재실이 있는 작은 마을(안 영축)에 좁은 들판이다. 남암산, 문수산, 영취산을 이은 능선과 봉우리가 선명히 눈앞에 다가온다. 모심기가 한창이라 배낭 메고 산에 가는 것이 미안키도 하지만 기계모심기가 아닌 여럿이 모여 하는 손모심기는 오랜만에 볼 만한 광경이다. 가끔 `몸뻬'를 입은 여인들이 지나고 등산복차림의 남녀도 자주 보인다. 고개중턱엔 조금 전에 보았던 경고판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채 그대로 서있고 왼편 계곡엔 승복입은 무당 등 아낙 3명이 상을 걸게 차려놓고 주문을 외고 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경고판이 종이호랑이임을 알려주는 현장이다. 요즘 세상엔 마구잡이 공갈을 여인들조차 우습게 보는가 보다.
짙은 숲이 하늘을 거의 가린 길은 시멘트 포장이 오랜된 탓에 노면이 많이 거칠다. 산굽이를 돌아가는 길 따라 발걸음을 떼 놓으며 녹음 냄새에 깊숙이 몸을 적신다. 고개를 올라서니 삼거리(시멘트 포장)인데 영해~ 고개, 문수초등학교~ 고개 길이 합쳐 문수암쪽으로 향해가다 주차장에서 끝난다. 삼거리에는 등산통제에 관한 낡은 간판이 있는데 율리~ 문수암~ 정상은 언제든지 등산이 허용된다고 써 놓았다. 주차장은 산기슭에 만들었지만 상당히 넓어 작은 운동장이라 할 수 있는데 오전 10시 이전임에도 벌써 50여대가 주차하고 있었다.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서는 길은 잘 다듬어진 돌계단 소로이다. 완만한 계단이 급격한 직계단으로 변하기도하고 간혹 흙길이나 하늘 가린 짙은 숲과 어울린다. 급경사 계단이 끝나는 왼편의 넓은 바위는 전망이 무척 좋고 낭떠러지 바위로 아래를 잘 내려다 볼 수 없을 정도이지만 가슴이 확트이게 한다. 이 바위 부근엔 고만고만한 암벽 10개가 경쟁하듯 병풍처럼 둘렀는데 모두가 암벽등산 훈련장이다. 여기서 문수사는 바로이다(8분 걸림).
문수사는 오래된 절이었으나 80년대에 대규모 불사를 해 그 모양이 완전히 바뀌었다. 바위를 뚫어 부처를 안치하고 범종을 만들고 종각을 세우는 등 여느 사찰과 비교해도 그 크기를 견줄 만하다. 크게 지은 대웅전에는 신도들이 많아 참배하려면 잠시 기다려야 할 정도. 어떤 사람은 문수사가 대규모 불사를 해 그 모양을 바꾼 것은 좋지만 문수산이란 그리 높지 않은 산에 비해 절 규모가 너무커 균형을 잃어 버렸다며 외형적 팽창만을 추구했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다.
종각 뒤편 가운데 계단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계단은 곧 흙길로 변해 묵은밭이 있는 고개로 이어지는데 왼편은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고 등산로는 숲속으로 계속된다. 문수사에서 20분이 채 안되는 곳에 있는 정상은 `이것이 정상인가'를 반문할 정도로 헬기장 시멘트포장 큰길 산불감시초소가 함께 있어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산상에 여러 가지 인공물을 안치하기 위해 잘라낸 큰나무 그루터기가 그대로 있고 정상을 평평하게 골랐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전망 할 수가 없어 이곳 저곳 옮겨야하는데다 산정에 큰 나무가 자라 눈앞을 가리기도 한다. 울산군 삼남 범서 청량면 경계라 면따라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 해야 한다. 아무튼 인간들이 섣부르게 인공물을 설치해 정상을 형편없이 만들어 자연경관을 마구 훼손한 대표적인 경우가 이 곳일 것 같다. 그래도 숲을 비집고 울산시의 거대한 아파트군이 동북쪽에 보인다.
하산은 다시 문수사로 되돌아 가기보다 봉우리 동쪽(감시 초소 방향 울산쪽)에 난 길이 좋다. 잘 뚫린 흙길은 계속 내리막이고 바위 돌 나무뿌리 등이 없어 안전하다. 서둘지 않아도 20분이면 고개에 닿는데 길은 능선과 오른편 내림길로 나누어진다. 내림길은 안영축과 연결되고 능선은 영취산으로 뻗어 있어 종주등산을 맛볼 수 있다. 봉우리를 넘어 다시 내려서면 또 갈림길인데 왼편은 영취산 허리를 돌아 울산공대 뒤편으로 빠지고 오른쪽길은 영취산 동남능선을 따라 안영축으로 향한다. 갈림길에서 동남능선을 타면 눈에 쏙 들어오는 묘지가 있어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큰길에 닿고 망해사지 부도 입구를 알리는 비석이 서있는 곳이다. 여기서 영축까지는 아침에 온 길과 같다. 정상~ 동쪽 능선~ 안영축의 등산로는 깨끗하고 인공가미의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전형적인 종주등산로(1시간20분 걸림)인데 반해 영축~ 문수사~ 정상은 시멘트포장 돌계단 등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스민 전형적인 인공등산로(?)로 1시간 거리의 재미없는 길이다.
아무튼 이렇게 판연히 다른 두 등산로를 가지고 있는 산도 드물 것 같다.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7번 국도 영축~문수사 주차장을 경유, 손쉽게 문수암을 둘러보고 문수산을 오를 수 있다. 문수초등에서 하차한 경우는 큰길을 따라 문수사 주차장까지 오는데 시간이 10여분 더 걸린다. 영축에서 울산까지는 버스료 300원이고 울산에 문수로라는 큰 길이 있듯이 이 산을 등산하는 사람도 거의가 울산시민들이다. 영축~ 망해사지 부도 입구~영취산 고개~ 동쪽능선~정상 ~문수사~ 큰도로~ 남암산~ 밤티고개를 종주할 경우 문수산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문수산지도 **
위성사진으로 본 울산-문수산 산행코스(구글어스 사진)
문수산-위치도와 주변지도
25,000분의1 지형도로 본 문수산의 위치
문수산 산행개념도 (국제신문 개념도)
문수산 산행지도(국립지리원 2만5천분의 1지도 2006년판)문수산 높이가 틀림(599.8->560으로 되어있음)
실제 산행을 한 문수산 고도표
** 문수사 **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절이 자리한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 때는 영취산(靈鷲山) 또는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였다. 면 이름 청량면은 바로 아 청량산에서 유래하였다.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신격호(辛格浩)의 시주로 대웅전을 중창하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범종각·산신각·종무소·요사채 등이 있다. 산신각 뒤에 화강암으로 제단을 쌓고 모신 대형 불상이 있다.
《삼국유사》 권5 〈연회도명문수점〉편에 문수보살과 변재천녀(辨財天女)에 얽힌 설화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연회라는 승려가 이 절에서 매일 《묘법연화경》을 읽자 연못에 있는 연꽃이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 이에 원성왕이 신기하게 여겨 연회를 국사(國師)로 초빙하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연회는 서쪽 고개 너머로 달아났다. 그가 고개를 넘자 밭을 갈던 한 노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 나를 매어 두려고 하므로 피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노인은 ‘수고롭게 멀리 갈 필요가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5리쯤 더 가다가 이번에는 시냇가에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앞서 노인에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노파는 ‘앞에 만났던 노인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연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급히 돌아왔다. 뒤에 연회는 궁궐에 들어가 국사가 되어 많은 일을 하였다. 당시 연회가 만났던 노인은 문수보살이고, 노파는 변재천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연회가 넘었던 고개를 문수고개,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또 무거(無去)설화도 전한다. 경순왕이 나라의 장래를 문수보살에게 계시받고자 두 왕자와 함께 문수사로 가는 길에 동자승을 만났는데, 동자승이 왕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수대성에게 계시를 받고자 한다고 하였다. 동자승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서갔다. 일행이 태화강을 건너자 갑자기 동자승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경순왕은 하늘이 자신을 져버린다고 탄식하며 환궁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고 하고, 왕이 탄식한 곳을 헐수정이라고 한다.